40일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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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0일 항쟁은 1979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유임을 둘러싸고 자민당 내 주류파와 비주류파 간의 갈등이 격화된 사건이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오히라의 사임을 요구하는 비주류파와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을 받아 총리직 유지를 시도하는 주류파 간의 대립은 당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두 차례의 총리 지명 선거를 거쳐 오히라가 총리로 재지명되면서 항쟁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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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항쟁 | |
---|---|
개요 | |
분쟁 명칭 | 40일 항쟁 |
일본어 명칭 | 四十日抗争 (시쥬지츠코소) |
시기 | 1980년 5월 |
장소 | 일본 |
원인 | 1979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자유민주당 내 주류-비주류 간의 권력 다툼 |
교전 세력 | 자유민주당 주류 (오히라 마사요시 파벌,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 자유민주당 비주류 (후쿠다 다케오 파벌, 미키 다케오 파벌, 나카소네 야스히로 파벌) |
결과 |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실시 자유민주당 참패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사망 스즈키 젠코 내각 출범 |
배경 | |
주요 배경 | 오히라 마사요시 정권의 자유민주당 내 기반 약화 당내 주류파와 비주류파 간의 심각한 대립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 행사 |
전개 | |
불신임안 제출 | 자유민주당 비주류파가 일본 사회당과 협력하여 오히라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 |
불신임안 표결 | 1980년 5월 16일 자유민주당 의원 다수 불참으로 불신임안 가결 |
중의원 해산 |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중의원 해산 (총선거 실시) |
선거 운동 중 총리 급사 |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선거 운동 중 급사 |
결과 및 영향 | |
선거 결과 | 자유민주당이 참패, 과반수 의석 확보 실패 |
정권 교체 | 자유민주당 내에서 스즈키 젠코를 총재로 추대, 스즈키 젠코 내각 출범 |
정치적 영향 | 자유민주당 내 파벌 정치의 폐해 부각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 심화 오히라 마사요시의 사망으로 인한 정치적 공백 발생 |
관련 항목 | |
관련 정보 |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나카 가쿠에이 스즈키 젠코 자유민주당 (일본) 일본 사회당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2. 경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1] 오히라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을 바탕으로 총리직 유지를 표명했지만,[4]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미키 다케오 등 비주류 파벌은 오히라의 사임을 강하게 요구했다.[3]
니시무라 에이이치 부총재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간의 갈등 조정을 시도했다. 후쿠다는 총리직과 총재직 분리 또는 퇴진일을 정해 오히라 정권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니시무라는 이를 바탕으로 오히라에게 거취를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청했다. 오히라는 처음에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후 니시무라에게 자신의 퇴진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결정 권한을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주류파 내에서는 이미 강경론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총리 후보 선출 방식을 두고 주류파는 참의원 의원까지 포함된 양원의원총회에서, 비주류파는 중의원 의원으로 구성된 대의사회에서 처리할 것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는 중의원에서는 비주류파가, 참의원에서는 주류파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당내 조정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총리-총재 분리안, 차기 총재 선거 조기 개최 등 타협안은 모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라는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쿠다 다케오와의 회담에서 당 분열을 우려한 나카소네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정권 유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5] 이로 인해 반(反)오히라 세력은 사임 요구를 더욱 강화했다. 니시무라 부총재는 중재를 위해 노력했으나, 오히라와 니시무라·후쿠다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주류파인 오히라 파와 다나카 파는 양원 의원 총회를 강행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반주류파는 후쿠다 다케오를 총리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 '자민당을 좋게 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반주류파는 양원 의원 총회가 열릴 예정이던 당 홀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고, 오히라에 가까운 하마다 코이치가 단신으로 쳐들어가 이를 철거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기도 했다.[8][9] 결국 주류파만 참석한 양원 의원 총회에서 오히라를 총리 후보로 결정했다.[10] 반면, 반주류파는 '자민당을 좋게 하는 모임'의 결정으로 후쿠다 다케오를 총리 후보로 합의했다.[10]
2. 1. 총선 패배와 오히라의 총리직 유지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248석을 얻는 데 그쳤다.[1] 이는 직전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얻은 249석보다도 1석 적은 수치였다. 1976년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미키 다케오가 총재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해서는 당시 총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을 받는 오히라는 총리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4] 이에 후쿠다 파벌, 나카소네 파벌, 미키 파벌 등 비주류파는 강하게 반발하며 오히라의 사임을 요구했다.[3] 비주류파는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할 움직임을 보였고, 주류파인 오히라 파벌과 다나카 파벌은 공명당 등 중도 정당과의 연립 정권을 모색하는 등 자민당 내 분열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일본국 헌법 제54조에 따라 국회 개회 기한이 다가오자, 10월 30일 특별 국회가 소집되었지만, 자민당은 총리 후보자를 단일화하지 못해 수반 지명 투표 없이 산회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2. 2. 자민당 내 항쟁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높아졌다.[1] 오히라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을 받아 연임을 표명했지만,[4]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미키 다케오 등 비주류 파벌은 오히라의 사임을 요구했다.[3]니시무라 에이이치 부총재는 주류파와 비주류파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후쿠다는 총리직과 총재직 분리 또는 퇴진일을 정해놓고 오히라 정권을 존속시키는 제안을 했고, 니시무라는 이를 바탕으로 오히라에게 거취를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청했다. 오히라는 처음에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으나, 이후 니시무라에게 자신의 퇴진 문제를 포함한 모든 결정 권한을 일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비주류파 내에서는 강경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총리 후보 선출 방식을 두고 주류파는 참의원 의원까지 포함된 양원의원총회에서, 비주류파는 중의원 의원으로 구성된 대의사회에서 처리할 것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이는 중의원에서는 비주류파가, 참의원에서는 주류파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당내에서는 조정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총리-총재 분리안, 차기 총재 선거 조기 개최 등 타협안은 모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2. 2. 1. '자민당을 좋게 하는 모임' 결성과 바리케이드 봉쇄
총선 후, 오히라 마사요시는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후쿠다 다케오와의 회담에서 당 분열을 우려한 나카소네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정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반(反)오히라 세력은 사임 요구를 강화했다.[5]니시무라 에이이치 부총재는 조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히라와 니시무라·후쿠다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오히라는 니시무라에게 거취를 일임하기로 했으나, 이미 반주류파는 강경론으로 결속을 강화한 뒤였다.
주류파인 오히라 파와 다나카 파는 양원 의원 총회를 강행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반주류파는 후쿠다 다케오를 수상 후보로 옹립하기 위해 '자민당을 좋게 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반주류파는 양원 의원 총회가 열릴 예정이던 당 홀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고, 오히라에 가까운 하마다 코이치가 단신으로 쳐들어가 이를 철거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기도 했다.[8][9] 결국 주류파만 참석한 양원 의원 총회에서 오히라를 수상 후보로 결정했다.[10] 반면, 반주류파는 '자민당을 좋게 하는 모임'의 결정으로 후쿠다 다케오를 수상 후보로 합의했다.[10]
2. 3. 총리 지명 선거
1979년 11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총리 지명 선거는 자민당 내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 두 명이 총리 후보로 출마하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14][15]중의원과 참의원 양원 모두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결선 투표가 실시되었다. 중의원에서는 오히라와 후쿠다가, 참의원에서는 오히라와 일본사회당 아스카타 이치오가 결선 투표에 올랐다. 결국 양원 모두 오히라가 총리로 지명되었다.[14][15][16]
신자유클럽을 제외한 야당들은 대부분 결선 투표에 불참했으며, 오히라파는 공명당을, 후쿠다파는 민사당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2. 3. 1. 중의원 총리 지명 선거 결과
1979년 11월 6일, 수반 지명 선거에서 자민당 내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 두 명이 총리 후보로 출마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14][15]1차 투표 결과,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어 자민당 상위 득표자 2명인 오히라와 후쿠다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 중의원 결선 투표에서 오히라는 138표, 후쿠다는 121표를 얻어 17표 차이로 오히라가 지명되었다.[14][15] 신자유클럽을 제외한 야당들은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라파는 공명당을, 후쿠다파는 민사당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두 당 모두 결선 투표에 불참했다.
참의원에서도 1차 투표 결과 오히라 78표, 일본사회당 아스카타 이치오 51표, 후쿠다 38표 순으로, 오히라와 아스카타가 결선 투표에 올랐다. 후쿠다파와 일부 소수 정당이 오히라에게 투표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권하여, 오히라 97표, 아스카타 52표로 오히라가 최종 지명되었다.[16]
후보 | 회파 | 1차 투표 득표 | 결선 투표 득표 |
---|---|---|---|
오히라 마사요시 (지명)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35 | 138 |
후쿠다 다케오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5 | 121 |
아스카타 이치오 | 일본사회당 | 107 | - |
다케무리 요시카츠 | 공명당·국민회의 | 58 | - |
미야모토 겐지 | 일본공산당·혁신공동 | 41 | - |
사사키 료사쿠 | 민사당·국민연합 | 36 | - |
다 에이후 | 사회민주연합 | 2 | - |
무효 | - | 7 | 252 |
투표 총수 | - | 511 | 511 |
(과반수) | - | 256 | - |
후보 | 회파 | 회파 인원[19] | 1차 투표 득표 | 결선 투표 득표 |
---|---|---|---|---|
오히라 마사요시 (지명)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4 | 78 | 97 |
아스카타 이치오 | 일본사회당 | 52 | 51 | 52 |
후쿠다 다케오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4 | 38 | - |
다케무리 요시카츠 | 공명당 | 28 | 27 | - |
미야모토 겐지 | 일본공산당 | 16 | 16 | - |
사사키 료사쿠 | 민사당 | 10 | 10 | - |
다 에이후 | 사회민주연합 | 4 | 3 | - |
고노 요헤이 | 신자유클럽 | 3 | 2 | - |
제2원클럽 | 5 | - | - | |
무소속 | 5 | - | - | |
궐원 | 5 | - | - | |
무효 | - | - | 0 | 1 |
백표 | - | - | 10 | 87 |
투표 총수 | - | - | 235 | 237 |
(과반수) | - | - | 118 | - |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상위 2인에 대한 결선 투표를 통해 다수 득표자를 지명한다.[20]
파벌・정당 등 | 오히라 마사요시에 투표 | 후쿠다 다케오에 투표 | 무효표 | |
---|---|---|---|---|
오히라 파 | 50명 | |||
다나카 파 | 48명 | |||
후쿠다 파 | 소노다 나오 | 49명 | ||
나카소네 파 | 오치 이헤이, 오이시 치하치, 기무라 다케치요, 노나카 에이지, 무토 요시후미 | 34명 | ||
미키 파 | 아리마 모토하루[21], 구지라오카 효스케[21], 시오야 가즈오, 지자키 우사부로 | 미키 다케오, 이데 이타로, 다나카 이사부로, 이시다 히로히데, 아카기 무네노리, 고모토 도시오, 가토 츠네타로, 모리야마 킨지, 니와 효스케, 모리 마츠다이라, 시부야 나오조, 가이후 토시키, 후지이 가츠시, 이토 소이치로, 노로 쿄이치, 오니시 마사오, 타니가와 가즈호, 스게나미 시게루, 사카모토 미토지로, 하시구치 다카시, 곤도 테츠오, 모리 미히데, 야마시타 토쿠오, 시가 세츠, 츠지 히데오 | 키타가와 이시마츠[21], 쿠도 이와오 | |
나카가와 그룹 | 하세가와 시로, 마츠자와 유조, 하세가와 슌, 나카가와 이치로, 후루야 토오루, 나카무라 히로미, 이시하라 신타로, 우에쿠사 요시키, 다카하시 다츠오 | |||
구 미즈타 파 | 오노 아키라, 미하라 아사오, 나카야마 마사키 | 사토 후미오, 이나무라 사콘시로 | ||
구 시이나 파 | 와타누키 타미스케 | 아라후네 세이쥬로 | ||
구 이시이 파 | 사카타 미치타 | |||
무파벌 | 우츠미 히데오, 오쿠노 세이스케, 카스야 시게루, 카모다 토시타로, 기무라 토시오[21], 코사카 토쿠사부로, 사토 신지, 타케우치 레이이치, 하마다 코이치, 후지타 요시미츠, 후나다 하지메, 후루이 요시미, 와타나베 미치오 | 아이자와 히데유키, 코사카 젠타로, 시이나 모토오, 네모토 류타로 | ||
자유국민회의 | 타하라 타카시 | |||
신자유 클럽 | 타가와 세이이치, 야마구치 토시오, 고노 요헤이, 타지마 마모루 | |||
무소속 | 다나카 가쿠에이,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와타나베 마사오 | 사토 타카유키 | 나다오 히로키치(의장[22]), 니시오카 타케오 |
나카소네 파에서는 친오히라 성향의 와타나베 미치오에 가까운 그룹이 오히라에게 투표했고, 미키 파에서는 당내 우파인 후쿠다에게 찬성하지 않는 의원들이 오히라에게 투표했다.
2. 3. 2. 참의원 총리 지명 선거 결과
1978년 11월 6일,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총리 지명 선거가 열렸다. 자유민주당 내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 두 명이 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 투표가 진행되었다.[14][15]중의원 결선 투표에서는 오히라가 138표, 후쿠다가 121표를 얻어 오히라가 지명되었다.[14][15] 신자유클럽을 제외한 야당은 결선 투표에 불참했다.[15]
참의원 1차 투표에서는 오히라 78표, 일본사회당의 아스카타 이치오 51표, 후쿠다 38표 순으로 득표했다. 결선 투표에서는 후쿠다파와 일부 소수 정당이 오히라에게 투표한 것을 제외하고는 기권하여, 오히라 97표, 아스카타 52표로 오히라가 최종 지명되었다.[16]
후보 | 회파 | 1차 투표 득표 | 결선 투표 득표 |
---|---|---|---|
오히라 마사요시 (지명)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35 | 138 |
후쿠다 다케오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5 | 121 |
아스카타 이치오 | 일본사회당 | 107 | - |
다케무리 요시카츠 | 공명당·국민회의 | 58 | - |
미야모토 겐지 | 일본공산당·혁신공동 | 41 | - |
사사키 료사쿠 | 민사당·국민연합 | 36 | - |
다 에이후 | 사회민주연합 | 2 | - |
무효 | - | 7 | 252 |
투표 총수 | - | 511 | 511 |
(과반수) | - | 256 | - |
후보 | 회파 | 회파 인원[19] | 1차 투표 득표 | 결선 투표 득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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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라 마사요시 (지명)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4 | 78 | 97 |
아스카타 이치오 | 일본사회당 | 52 | 51 | 52 |
후쿠다 다케오 | 자유민주당·자유국민회의 | 124 | 38 | - |
다케무리 요시카츠 | 공명당 | 28 | 27 | - |
미야모토 겐지 | 일본공산당 | 16 | 16 | - |
사사키 료사쿠 | 민사당 | 10 | 10 | - |
다 에이후 | 사회민주연합 | 4 | 3 | - |
고노 요헤이 | 신자유클럽 | 3 | 2 | - |
제2원클럽 | 5 | - | - | |
무소속 | 5 | - | - | |
궐원 | 5 | - | - | |
무효 | - | - | 0 | 1 |
백표 | - | - | 10 | 87 |
투표 총수 | - | - | 235 | 237 |
(과반수) | - | - | 118 | - |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상위 2명으로 결선 투표를 하며, 결선 투표에서는 다수 득표자가 지명된다.[20]
참조
[1]
서적
大平正芳
[2]
서적
自民党戦国史
[3]
서적
大平正芳
[4]
서적
大平正芳
[5]
서적
小説吉田学校
[6]
서적
自民党戦国史
[7]
문서
[8]
Youtube
https://www.youtube.[...]
[9]
서적
YUIGON もはや最期だ。すべてを明かそう。
ポプラ社
2011-05
[10]
Youtube
昭和54年11月 中日ニュース No.1347 3「大平首相、再指名される」 - YouTube
https://www.youtube.[...]
[11]
서적
自民党戦国史
[12]
문서
[13]
문서
[14]
서적
大平正芳
[15]
웹사이트
衆議院議事録 第89回国会 本会議 第2号 昭和五十四年十一月六日(火曜日)
https://kokkai.ndl.g[...]
[16]
웹사이트
参議院議事録 第89回国会 本会議 第2号 昭和五十四年十一月六日(火曜日)
https://kokkai.ndl.g[...]
[17]
서적
大平正芳
[18]
서적
大平正芳
[19]
웹사이트
会派別所属議員数の変遷
https://www.sangiin.[...]
[20]
웹사이트
衆議院規則第18条第3項、参議院規則第20条第3項
https://www.sangiin.[...]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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